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유문(幼文), 호는 소암(蘇巖). 이동(李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태석(李泰錫)이다. 아버지는 이광직(李光溭)이며, 어머니는 이수강(李壽崗)의 딸이다.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8년(정조 2) 사은사의 서장관이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으며, 1783년(정조 7)에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으로 다시 청나라에 갈 때 아들 이승훈(李承薰)을 동반하였다.
이 때 이승훈이 북경(北京)에 들어가 천주교회 남당(南堂)에서 최초로 영세를 받았고, 돌아올 때에는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천주교서적 및 서양학술서적을 사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를 퍼뜨렸다.
1791년 의주부윤이 되었고, 이해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을 때에 아들 이승훈이 이벽(李蘗)·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교회의 지도급 인물이 되어 활동하였는데, 정부의 박해가 시작되자 이승훈은 천주교서적을 불사르고 동시에 벽이문(闢異文: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 서학을 배척하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 뒤 부사직으로 천주교탄압에 앞장섰으며, 그 뒤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동욱의 사후 1801년(순조 1) 아들이 천주교도로 신유사옥 때 순교하자 관작이 추탈되었다. 글씨가 뛰어났으며, 이동욱이 쓴 「자규루상량문(子規樓上樑文)」은 규장각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