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거비(去非), 호는 태천(苔川)·태호(苔湖)·천태산인(天台山人).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김제민(金齊閔)이고, 아버지는 김서(金曙)이며, 어머니는 승의랑 정희민(丁希閔)의 딸이다.
1616년(광해군 8)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교서관교감(校書館校勘)에 올랐다. 1617년기자헌(奇自獻)·이항복(李恒福)·이원익(李元翼)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을 강력히 반대해 회령·경원으로 귀양갈 때 김지수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정자(正字) 및 예조·병조의 낭관을 지냈다. 1626년 서장관이 되어 정사 김상헌(金尙憲)을 따라 명나라에 가는 도중 부벽루에 제(題)한 시를 보고 감탄, 연로에서 수창(酬唱)한 시를 엮어 『조천록(朝天錄)』을 펴냈으며, 이를 본 명나라 사람들이 경모해 마지않았다.
뒤에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시강원의 문학·필선(弼善)·보덕(輔德)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다. 1628년 종성부사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때 송광유(宋光裕)의 무고한 옥사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고부(古阜)로 돌아갔다.
청나라가 새롭게 일어나는 현실에서 존주사상(尊周思想)에 철저했던 인물로, 늙어서는 천태산 밑에 집을 짓고 풍류와 독서로 소일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향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열과 성을 다해 처리했으며, 사람을 대함에 항상 온유하였다.
또한, 매사에 의리를 제일로 삼아 고매한 인격으로 명망을 얻은 당대의 인물이었다. 특히, 시와 그림에 능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부의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태천집(苔泉集)』 3권이 전한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