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06m, 너비 1.6m. 1377년(우왕 3) 고려 말 승려인 나옹(懶翁) 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비의 형식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의 것으로 개석이 없다. 그런데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면서 비신이 파손되어 보존 처리가 이루어졌고,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비신을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 있으며, 원형을 본 따서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이수(螭首)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비신 상부에 쌍룡을 깊게 조각하고 그 중앙에 제액을 만들어 ‘禪覺王師之碑(선각왕사지비)’ 6자를 새겼다. 자경은 2∼2.4㎝, 전액의 자경은 11.2㎝이다. 비문은 이색(李穡)이 짓고, 권중화(權仲和)가 예서로 쓰고 전액도 하였다.
비문에 따르면 왕사의 휘는 혜근(惠勤), 호는 나옹, 초명은 원혜(元惠)이고, 영해부(寧海府) 사람이며, 선각은 시호이다. 1320년(충숙왕 7)에 태어나 1344년에 회암사에 입문하였다. 1348년에는 원나라에 가서 지공(指空)에게 법의·불자(拂子: 번뇌를 물리치는 표지물)·범서를 받았다. 또 원나라의 순제(順帝)가 대사를 연도(燕都)의 광제사(廣濟寺)에 주거하게 하고, 금란가사와 폐백을 하사하였다.
나옹이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자 왕이 그에게 가사와 불자를 하사하고 신광사(神光寺)에 주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구월산·금강산 등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회암사에 들어와 절을 크게 중수하고 1377년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을 행하였다. 후미에는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명문을 새겼다.
이 비의 글씨는 예서인데, 예서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 말에 이 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도 예서가 쓰이지 않을 때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서 나옹비는, “팔분서(八分書: 예서 이분쯤과 전서 팔분쯤을 섞어 만든 한자의 글씨체)인데 태정(太整)하나 신채(神彩: 훌륭한 풍채)가 없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결구도 엄정하고 필력도 주경하며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중국의 「희평석경(熹平石經)」을 방불케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