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5년 건립. 비신의 높이 325㎝, 너비 162㎝, 두께 30㎝. 원래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의 고달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현재 경복궁 안으로 옮겨져 있는데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장단열(張端說)이 전액(篆額 : 전자로 쓴 비갈이나 현판의 제액)을 쓰고, 또한 정간선을 그어 해서로 비문도 썼으며, 각자(刻字)는 이정순(李貞順)이 하였다. 원종은 국사였으며 법명은 찬유(燦幽), 자는 도광(道光)이며 속성은 김씨(金氏)로 계림 하남사람이다. 비에는 원종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비문에 대하여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는 고달원비는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의 법으로 썼는데 글자가 납작한 편이라고 하였고, 『서정(書鯖)』에 혜진탑비는 점획이 원혼(圓渾 : 둥글고 원만함)하고 취태(取態)가 단정하다고 평하였으며, 『조선금석고』에는 자경(字經)이 7푼의 해서 구양순법(歐陽詢法)으로 조술(祖述 : 스승의 도를 본받아서 서술하여 밝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안류법(顔柳法)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고, 오히려 묘지명이나 초당의 우세남(虞世南)의 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서자(書者) 장단열은 고려를 통하여 제1급의 서가인데, 그가 쓴 봉암사정진대사탑비 등에 비하면 이 비의 품격은 크게 못 미친다. 필체가 정연하고 결구가 평정, 정묘하며 필력이 힘찬데, 투박하여 청경(淸輕 : 맑고 가벼움)한 맛은 덜하다.
통일신라 이후 비의 서자·찬자·각자의 이름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로, 중국에는 각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서예사 흐름의 독특한 일면을 보여주는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