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신 높이 188㎝, 너비 98㎝, 두께 20㎝. 통일신라 말 사굴산문의 선승인 낭원대사(朗圓大師)의 탑비다. 대사가 96세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는 낭원대사朗圓大師라는 시호와 오진悟眞이라는 탑명을 내렸고 대사가 입적한 10년 뒤인 940년(태조 23)에 비가 건립되었다. 보현사는 통일신라 때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비의 원명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高麗國溟州普賢山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이다. 비문에는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구족달(仇足達)이 쓰고 임문윤(任文伊)이 새겼다. 글씨는 2㎝ 정도의 해서로 전체적으로 구양순풍이지만 구양순의 글씨는 가로획이 대체로 우상향인 반면 구족달의 글씨는 평세를 취하고 있다. 또 가로획의 기필(起筆)과 수필(收筆), 전절(轉折) 부분이 구양순의 글씨보다 날카롭고 각이 져서 구족달의 예리하고 웅경한 필세를 느낄 수 있다.
귀부(龜趺) · 비신(碑身) · 이수(螭首) 모두 완전하다. 귀부의 귀두(龜頭)는 통일신라 말기 선사비와 같이 용두로 되어있는데 다른 비와는 달리 이수에 제액題額이 없다. 이수의 쌍룡은 보주를 다투듯 힘차게 투각되어 있으며, 이수 중앙에는 복발(覆鉢)과 1단의 상륜上輪 및 화염에 쌓인 보주가 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