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때에는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였다. 600년(무왕 1)에 백제의 고승 관륵(觀勒)과 강운(降雲)이 창건하였고, 661년(문무왕 1)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였다. 이 절이 사세(寺勢)를 크게 넓힌 것은 고려 태조의 중창에서 비롯된다.
고려 태조가 이 절에 올라왔을 때 법기보살(法起菩薩)이 현신(現身)하여 석상(石上)에서 방광[放光:빛이 남]을 하였는데, 이 일을 잊지 못하여 빛이 나타났던 바위에 정례(頂禮)하고 절을 중창했다고 한다. 지금에도 법기보살이 현신한 곳을 방광대(放光臺)라고 하고, 태조가 정례한 곳을 배점(拜岾)이라고 한다. 1425년(세종 7) 5월에 교종(敎宗)에 소속시키고 전지(田地) 150결(結)을 주었다.
이 절의 본전은 반야전(般若殿)이며, 표훈사와 마찬가지로 법기보살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주존불 아래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고 있는데, 언제의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그 맞은편에는 대들보가 없는 6각형의 전당(殿堂) 약사전(藥師殿)이 있는데, 벽화는 오도자(吳道子)의 필화(筆畵)를 모사한 것이며, 중앙에 모신 석조약사여래상은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도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탑은 2중 기단에 3층으로 조성된 전형적인 신라 탑의 양식이며, 석등은 그보다 조금 연대가 떨어지는 양식이다. 이 탑은 탑거리, 신림사(神琳寺)의 탑과 함께 금강삼고탑(金剛三古塔)이라고 불린다. 절 경내의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누각이 있는데, 헐성루(歇惺樓)라고 한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다고 하며, 금강산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