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고려 말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전국 최대 규모의 가람으로 조영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유적과 최고급 유물들이 출토되어 당대 불교 사상과 문화를 대표하는 사찰이었음을 알게 한다.
양주 회암사는 창건 시기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지만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늦어도 고려 중기 이전에는 창건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인도 출신의 원나라 승려 지공선사(指空禪師)가 1326년 3월경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여 1328년 9월 돌아갈 때까지 통도사(通度寺)와 화장사(華藏寺) 등 전국의 여러 사찰을 순례하다가 회암사의 지형이 인도의 아란타사(阿蘭陀寺)와 같아 가람을 이룩하면 불법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 뒤에 제자인 나옹(懶翁) 등이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이 이색(李穡)이 지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와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회암사 중창기(檜巖寺重創記)」 등에 전하고 있다. 고려 말기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선각왕사 혜근(禪覺王師 惠勤, 13201376)으로, 원나라에 가서 지공선사로부터 수학하여 법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나옹이 회암사의 전당(殿堂) 확장 공사를 끝냈을 때에는 262칸의 전각이 있었으며, 1376년 4월 낙성 법회 개최 때에는 전국의 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대거 참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회암사가 크게 발전하자 유생들은 백성들이 회암사에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주청할 정도였다. 이에 국왕은 나옹을 다른 사찰로 옮겨 주석하게 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기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도 제자인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 1327~1405년)와 함께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암사는 더더욱 부각되는데,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물려주고 스승으로 삼았던 무학대사가 회암사에 머물 때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하였다. 불심이 깊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전국의 여러 불사를 직접 관장하거나 후원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회암사 중창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2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보우(普雨)로 하여금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케 하여 전국 제일의 사찰로 중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회암사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대의 불교 사상과 문화를 주도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물에 회암사에서 거행된 왕실 관련 의식이나 행사 등이 전재되어 있으며, 왕실 후원으로 실시된 회암사의 중창과 중수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문정왕후 이후 불교계의 쇠퇴 분위기 속에 회암사도 쇠락하면서 서서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지는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가 1997년 이후 수년 간에 걸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웅장하였던 사찰의 규모와 위상을 보여 주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회암사는 기록처럼 고려 말기부터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져 조선시대 들어와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선 중기까지 불교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다가 조선 후기에 폐사된 후 다시는 중창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회암사지는 평지가 아닌 낮은 구릉이 있는 산간에 조영되었음에도 평지 가람에서 볼 수 있는 남회랑(南回廊)이 있었으며, 석축이나 건물들의 배치 형식이 궁궐과 닮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특정한 목적으로 건립된 건물들도 있었다. 또한 석재들을 다듬은 기법도 상당히 우수한 석공들이 관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회암사는 전체 규모와 가람의 조영 기법 등으로 보아 왕실에 소속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공사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기와, 자기(瓷器), 도기(陶器), 소조품(塑造品), 금속품, 석제품 등으로 다양하고 품질도 최고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상당수 유물들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후원자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고 제작 배경과 함께 당대 유물들의 편년을 설정하는 데 기준이 되고 있다. 또한 궁궐이나 왕실 관련 사찰에서만 사용된 청기와를 비롯하여 궁궐 건축물의 지붕 추녀마루에 올리는 용두(龍頭)나 잡상(雜像)도 출토되었으며, 최고급 도자기와 금속 공예품 등이 다량으로 수습되어 당시 회암사의 위상이 상당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회암사의 부침과 함께 사용되거나 폐기된 기와는 사찰의 연혁을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기도 하는데, 다른 사지들보다 다종다양한 범자(梵字) 진언(眞言)이 새겨진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막새류를 중심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는데, 제작 기법이 우수할 뿐 아니라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기와도 다수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범자 진언이 새겨진 기와가 지속적으로 제작 활용되었는데,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범자 기와는 그 전환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범자 진언이 새겨진 기와 사용은 당시 밀교가 서서히 유행하면서 육자진언(六字眞言)을 비롯한 특정 진언에 대한 신앙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