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팔각 원당형 석조 부도 ( )

목차
관련 정보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부도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부도
건축
유적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신륵사에 있는 조선전기 팔각원당형 석조 불탑. 사리탑. 시도유형문화재.
이칭
이칭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부도(驪州神勒寺八角圓堂形浮屠), 여주 신륵사 팔각당형 부도(驪州神勒寺八角堂形浮屠),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승탑(驪州神勒寺八角圓堂形僧塔), 여주 신륵사 팔각당형 승탑(驪州神勒寺八角堂形僧塔)
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신륵사에 있는 조선전기 팔각원당형 석조 불탑. 사리탑.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200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부도는 여주 신륵사 경내의 서쪽 명부전 뒤편에 원구형(圓球形) 부도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원래 조사당 북쪽으로 형성된 낮은 구릉 너머에 있었는데, 파손과 도난 등을 우려하여 1966년 11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당시 3기의 부도가 옮겨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2기만 남아 있다. 부도를 옮길 때 상대석 상면과 탑신석 하면에서 사리합(舍利盒)이 발견, 수습되었다. 사리합은 표면에 국화문(菊花紋)을 백상감(白象嵌)하고 다시 그 주위에 연주(連珠)와 연화(蓮華) 등을 흑상감(黑象嵌)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연회색을 머금은 청자유를 시유하고 표면에 미세한 빙렬 등이 있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부도는 부분적으로 파손 및 결실된 부재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리고 부도를 다듬어 결구한 기법이 우수하고 탑신석에 범자를 새긴 것이 독특하다.

내용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는 탑신부의 탑신석과 옥개석이 팔각형으로 구성된 정자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부도이다. 지대석은 사각형으로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평면 팔각의 낮은 괴임대를 두었다. 그리고 지대석 상면에는 연잎이 넓은 연화문을 수평에 가깝도록 평면적으로 표현하였다. 중대석과 상대석은 보기 드물게 한 돌로 치석하였다. 중대석은 낮게 원형으로 마련되었으며, 상대석은 연화문과 갑석 형태의 받침단을 두었다. 상대석은 모서리마다 넓게 1옆의 연화문을 앙련문(仰蓮紋)으로 조각하고 연화문 사이에는 연잎을 추가로 장식하였다. 그리고 상대석 상면 가운데에는 탑신 괴임 1단을 두고 평면 팔각으로 낮은 홈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석조물에서 보기 드문 예로, 탑신석이 상대석 상면에 견고하게 끼워져 고정되도록 시공하였음을 알려 준다.

탑신부의 탑신석은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여 사각형으로 구획한 후 그 안에 범자 또는 자물쇠 문양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탑신석 2면에는 봉황문(鳳凰紋)이 새겨진 자물쇠가 표현되었고, 4면에는 범자가 1자씩 새겨졌다. 옥개석은 하부에 1단 받침을 두고 낙수홈을 마련하였다. 옥개석의 처마부는 거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으며,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낙수면이 만나는 합각부에는 마루부를 반원형으로 표현하였는데, 처마 쪽으로 내려가면서 굵고 높아지도록 하였다. 옥개석의 마루부 끝 처마부에는 좌우 대칭을 이룬 귀꽃을 높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 부도에서 많이 나타난다.

상륜부는 하부에 마련된 받침대가 파손되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현재 원형의 복발석(覆鉢石)과 보주석(寶珠石)이 올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는 둔중한 인상을 준다. 중대석이 낮고 옥개석이 평박하게 마련되었으며, 지대석 상면과 상대석에 표현된 연화문에는 간략화·형식화의 경향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전체적인 양식이 고려 말기에 건립된 달성 도학동 부도와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 부도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건립된 팔각당형 양식을 계승하여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도 표면에 주인공이나 건립 시기 등을 알 수 있는 명문이나 관련 기록이 없다. 다만 신륵사에는 고려 말기인 1376년 건립된 보제존자 석종이 있는데, 관련 기록에 보제존자의 제자들이 신륵사에 주석하며 조선 전기까지 많은 불사를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도의 주인공은 조선 전기 보제존자의 법통을 이으면서 신륵사를 중창하였거나 신륵사에서 입적한 승려일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는 불교계가 위축되고 승려들에 대한 대우가 낮아지면서 부도의 건립이 왕실과 관련된 승려들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신륵사에 팔각원당형 부도가 건립되었다는 것은 당시 신륵사에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승려가 머물렀거나 상당한 위상이 있었던 사찰이었음을 방증해 준다.

탑신석에서 자물쇠와 범자가 함께 새겨진 예는 조선 후기 부도에서는 여러 기가 확인되고 있지만 신라와 고려시대 부도에서는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 범자가 밀교적인 색채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신륵사 팔각원당형 부도의 탑신석 4면에 새겨진 범자는 사천왕상을 상징하는 종자(種字)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부도는 탑신석에 조각상으로서의 사천왕상을 새기지 않고, 사천왕상을 상징하는 범자를 새긴 드문 예로서 밀교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하다.

참고문헌

「조선 세조 대의 불교 미술 연구」(엄기표, 『한국학연구』 26, 2012)
「고려∼조선시대 범자 진언이 새겨진 석조물의 현황과 의미」(엄기표, 『역사민속학』 36, 2011)
「조선 전기 석조 부도 양식의 일고찰」(정영호, 『동양학』 3, 1973)
「여주 신륵사 일명(逸名) 부도 내 발견 사리합」(정양모, 『고고미술』 9-5, 1968)
집필자
엄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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