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송림사 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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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송림사 부도 정측면
예산 송림사 부도 정측면
건축
유적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송림사 경내에 있는 조선전기 팔각당형 석조 불탑. 사리탑. 시도유형문화재.
이칭
이칭
예산 송림사 승탑(禮山松林寺僧塔)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송림사 경내에 있는 조선전기 팔각당형 석조 불탑. 사리탑.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200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부도는 서편으로 형성된 골짜기에 근현대기에 새롭게 중창된 송림사 경내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원래의 사찰 이름은 알려진 것이 없고, 중창될 당시 이 일대에 소나무가 많아 송림사라 하였다고 한다. 부도가 위치한 사역 일대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편과 자기편이 확인되고 있다. 이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이 일대에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지에는 부도 2기와 석탑 1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경찰이 보호라는 명목 아래 부도와 석탑을 경찰서로 옮겨 갔다고 한다. 이후 한 승려가 사지에 조그만 사찰을 짓고 명맥을 이어 나갔고 해방이 되자 경찰서에 남아 있던 부도 1기를 사지로 다시 옮겨 왔다고 한다. 나머지 부도 1기와 석탑은 행방을 알 수 없었지만 이 부도는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내용

예산 송림사 부도는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신라와 고려시대에 성행한 팔각당형(八角堂形) 양식을 하고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결구되었는데, 모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지대석은 팔각형이며, 하대석은 면석부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문양을 추가로 장식하였다. 하대석의 안상 안에는 구름이 뒤엉킨 형상과 연주문 등 다양한 문양들이 표현되어 장인의 기교가 엿보인다. 하대석 상부에는 16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었는데, 연화문 외곽에 돋을대를 마련하였으며, 연잎이 날카롭고 길쭉하게 표현되어 특징적이다. 중대석은 구름과 용이 함께 뒤엉켜 있는 운룡문석(雲龍紋石)으로, 모서리에 각을 주어 팔각형의 평면이 유지되도록 하였다. 중대석 앞면에는 2마리 용이 서기(瑞氣)를 내뿜으며 마주보고 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형상이, 뒷면에는 2마리 용이 각각 서기를 길게 내뿜으며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 표현되어 있다. 상대석은 하부에 각형(角形) 2단의 낮은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16엽 연화문을 장식하였는데 하대석과 동일한 기법으로 되어 있다. 상대석 상면에는 낮은 2단의 탑신석 괴임을 마련하고 그 위에 탑신석을 올렸다.

탑신석은 각 면에 우주(隅柱)를 세워 사각형으로 구획하였는데, 앞면과 뒷면에만 용두(龍頭)가 새겨진 자물쇠를 표현하였다. 옥개석은 하부에 2단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부 합각부에는 길게 사래를 표현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보이며, 합각부에는 굵고 높은 마루부가 표현되어 있다. 마루 끝에는 귀꽃을 높게 돌출시켜 장식적인 기교와 함께 우수한 석공의 기술을 보여 준다.

상륜부는 받침석-보개석-보주석 등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 중 보주석은 규모와 치석 수법 등으로 보아 원래의 부재가 아니라 다른 석조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예산 송림사 부도는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의 것이라고 전해지기도 하나 신라와 고려시대 부도의 건립 동향과 양식 등으로 보아 도선국사의 부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특히 도선국사의 부도는 탑비문(塔碑文)과 고려 초기까지 크게 활약한 그의 제자 경보(慶甫)의 행적 등으로 보아 광양 옥룡사지(玉龍寺址)에 건립되었음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이 부도는 팔각당형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각 부재의 치석과 결구 수법이 정연하여 신라와 고려시대 건립된 부도의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운룡문석으로 된 중대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고달사지 부도,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부도(보물, 1963년 지정), 흥법사 진공대사탑 등과 양식적으로 친연성을 보인다. 그러나 세부적인 치석과 장식 수법에서는 전체적으로 간략화의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 부도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부여 무량사 김시습 부도와 강한 친연성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계가 위축되고 승려들에 대한 대우가 낮아지면서 왕실과 관련된 승려들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부도가 건립되었는데, 이곳에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부도가 건립되었다는 것은 다양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조선 전기 부도의 특징 연구」(이수정, 『문화사학』 37, 2012)
「조선 세조 대의 불교 미술 연구」(엄기표, 『한국학연구』 26, 2012)
「조선 전기 석조 부도 양식의 일고찰」(정영호, 『동양학』 3, 1973)
집필자
엄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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