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서원(瑞原). 자는 공가(公可). 아버지는 염덕방(廉德方) 이다.
인종(仁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장서기(廣州掌書記)가 되었는데, 정직하고 공무에 충실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廬幕)에 살아 마을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으며, 첨사부녹사(僉事府錄事)가 되었다.
1170년에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의 시절) 때의 인연으로 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며 뒤이어 판대부사(判大府事)가 되었다. 1177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 35인과 명경(明經) 4인을 뽑았다. 그해 염신약의 종이 정중부(鄭仲夫)의 종과 다투다가 정중부에게 잡혀 죽고 염신약은 파면되었다.
1178년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서는 조위총(趙位寵)이 허위사실을 풀어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데 대하여 그것이 허위임을 밝히고 조위총의 사자로 금나라에 갔던 자를 영청현(永淸縣: 龍川)에서 잡아 죽였다.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고 1183년에 추밀원부사 한림학사 승지(樞密院副使翰林學士承旨)가 되었으며, 1192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염신약은 몸은 작으나 담이 커서 세상 사람들이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안영(晏嬰)에 비하였다. 박학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후한서(後漢書)』에 능하였고 한때 고문대책(高文大冊: 문장이 뛰어나고 내용이 웅대한 저작)이 염신약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