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태조가 919년(태조 2)에 창건한 십찰(十刹) 중의 하나이다. 개성의 다른 절에 비하여 왕실의 행향(行香)이 적었으나 문종은 모후(母后)의 휘신도량(諱晨道場)을 개설하였고, 선종과 의종은 나한재(羅漢齋)를 베풀었으며, 예종은 소재도량(消災道場)을, 기타 여러 왕들이 반승(飯僧: 고려 때 승려들에게 齋食을 베풀던 행사. 齋僧이라고도 함)을 개설하였다.
이 절은 교종의 총관단(總官壇)으로서 5교종 승려들의 선시장(選試場)이기도 하였다. 지광국사(智光國師)와 혜덕왕사(慧德王師)가 이곳에서 응시하여 승직에 오르는 등 고려 교종 승려들의 등용문이었다.
몽고의 병란으로 불타버린 뒤 1275년(충렬왕 1)에 제상궁(提上宮)을 폐하고 오대사(五大寺)를 중수할 때 이 절도 중건하였다. 1277년에는 장륙존상을 만들고 왕과 공주가 법회를 열었으며, 1283년에는 석탑을 조성하였다.
이 절이 크게 융성하게 된 것은 공민왕 이후이다. 1365년(공민왕 14)에 노국공주가 죽자 왕은 이듬해 공주의 영전(影殿)을 이 절에 지을 것을 명하였다. 완공한 지 2년 만에 영전이 좁다는 이유로 마암(馬巖)으로 옮겨서 다시 짓게 하여 1370년에 완공을 보았으나, 3층의 상량(上樑)이 떨어져 인부 26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생기자, 태후 및 신돈(辛旽)ㆍ이춘부(李春富) 등의 요청에 의하여 다시 왕륜사 옛터에 영전을 중수하기 시작하였다. 이 영전을 인희전(仁熙殿)이라고 하였다.
영전의 용마루 위에 놓인 취두(鷲頭)에 황금 650냥, 은 800냥이 사용되었는데, 이와 같은 사치는 그 유래를 찾기 힘든 것이다. 이곳에서 열린 반승ㆍ시상(施賞)ㆍ연신(宴臣) 등의 사례 또한 무수하였다.
공민왕이 죽자 1376년(우왕 2)왕륜사의 서편에 공민왕의 영전인 혜명전(惠明殿)을 지었으나, 그 규모와 역사(役事)의 진행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고려 멸망 후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1682년(숙종 8) 이 부근에서 오관서원(五冠書院)을 경영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만 전한다.
민족항일기에 절터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내어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당대 유물로서 석불(石佛) 4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