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년(현종 18)에 창건하였으며, 1036년(정종 2)에 왕이 자식 넷이 있을 경우에는 한 자식의 출가를 허락한다는 법을 제정한 뒤 이 절에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경률(經律)을 익히는 한편 시험을 치르는 장소로 만들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1065년(문종 19)에 내전(內殿)에서 경덕국사(景德國師)로부터 계를 받고 삭발하여 출가한 후 경덕국사를 따라 영통사로 옮겨 수학하였다. 그의 입적 후인 1125년(인조 3)에는 비를 이 절에 건립하였다. 고려 왕실에서는 다른 어떤 사찰보다 이 절에서 많은 참배를 갖게 되었다.
인종을 비롯하여 영종 · 신종 · 충렬왕 · 충선왕 · 공민왕 등은 자주 이 절에 행차하여 분향하였을 뿐 아니라 이 절과 인연이 깊은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진영각을 두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재(齋)나 기신도량(忌晨道場)이 많이 개설되었다.
특히 인종은 이 절을 크게 사모하여 그 어느 왕보다 자주 행향(行香)하였는데, 1146년 정월에는 화엄회(華嚴會)를 열게 하고 친히 지은 불소(佛疏)를 신하들 앞에서 설하였다.
문화유산으로는 대각국사비명(大覺國師碑銘)을 비롯하여 서삼층석탑(西三層石塔)과 동삼층석탑 등이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 절에는 고려 문종의 화상과 홍자번(洪自藩)의 화상이 있었다고 하며, 서루(西樓)의 경치는 송도에서 제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절을 대상으로 읊은 이규보(李奎報) · 김구용(金九容) · 변계량(卞季良) · 석월창(釋月窓) · 권근(權近) · 이원(李原) · 성임(成任) · 이승소(李承召) 등의 시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1901년 5월 화재로 사찰이 전소(全燒)되었다. 이후 2002년 11월 대한민국의 대한불교천태종 교단과 북한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가 함께 복원사업에 착수하여 2005년 10월 2만여 평의 부지에 29개의 전각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