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용(仲容), 호는 양파(陽坡). 고려의 명필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홍관(洪灌)의 7세손이다.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손자이며, 삼사사(三司使) 홍융(洪戎)의 둘째아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羅裕)이며, 장인은 찬성사 권준(權準)이다.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조카이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문과에 급제해, 1348년(충목왕 4) 밀직제학에 제수되었다.
1352년(공민왕 1)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다. 뒤에 추성양절좌리공신(推誠亮節佐理功臣)이 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1353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공거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이색(李穡) 등 33인을 뽑았다.
그 해 11월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좌정승을 거쳐 우정승이 되었다. 또한, 1354년 문하시중이 되어 단성양절보리안사공신(端誠亮節輔理安社功臣)의 호를 받고 남양후(南陽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61년에는 문하시중이 되어, 홍건적의 침입 때 피난하자는 여러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고 개경을 사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서경이 함락되자 안동파천에 호종해 개경수복의 방략(方略)을 건의하였다. 피난 중 왕에게 절제생활을 권하였다. 또한, 민폐를 줄이기 위해 농한기에 환도할 것을 주장해 왕이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1362년에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유숙(柳淑)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박실(朴實) 등 33인을 뽑았다. 이듬해 김용(金鏞)이 주모한 흥왕사의 난 때 피살되었다.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추록되고 정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양파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