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평장사를 지낸 민영모(閔令謨)의 6대손이며, 위위경(衛尉卿) 민휘(閔暉)의 손자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여흥군(驪興君) 민지(閔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찬성 신사전(申思銓)의 딸이다. 부인은 대제학 이언충(李彦冲)의 딸이다.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중전시(中殿試)에 급제하여 석주(碩州)·보성(寶城)·강화(江華) 등을 다스리고 서해도(西海道)·양광도(楊廣道)를 안무(安撫)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민상정의 명성이 높았다 한다.
또한, 민상정이 양광도·서해도를 다스릴 때 권귀(權貴)에게 재물을 실어 보내는 자가 있었는데 이를 압수하여 국고로 보냈다 한다. 이로 말미암아 지방호족들이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였다.
청렴하고 공평하여 이름이 높았고 충숙왕 때 사헌장령(司憲掌令)을 거쳐 1332년(충숙왕 복위 1)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이해 왕이 원나라에 있었는데 윤석(尹碩)·손기(孫琦)의 옥사가 일어나자 민상정과 조염휘(趙炎輝)·장백상(蔣伯祥) 등을 보내어 이를 국문하였으나, 그들이 원나라에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이를 심문하니 백상 등이 모두 뇌물을 받고 법을 굽혔으나 오직 민상정만은 굽히지 않았다.
1336년 개원(改元)을 축하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벼슬이 찬성사에 올라 전주(銓注)를 총괄하고 관직의 수를 줄여 고제(古制)를 부활시켰다. 성품이 강직하여 비록 골육지친(骨肉之親)일지라도 그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