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호부원외랑 민의(閔懿)이며, 아들은 민식(閔湜), 민공규(閔公珪, 초명은 閔嗣忠)이다.
1138년(인종 16) 문과에 응시해 부(賦)를 지었는데, 이것이 율격(律格)에 맞지 않아 동지공거(同知貢擧)인 이지저(李之氐)의 반대가 있었지만 지공거 최유(崔濡)가 민영모의 글에 기개가 있다고 주장해 합격되었다.
이후 이부원외랑이 되었으며, 1175년(명종 5) 형부시랑으로 고시관이 되어 승구원(承丘源) 및 방희진(方希進) 등을 합격시켰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꿈에 본 재상과 민영모가 닮았다고 해서 추밀원부사에 탁용되었다. 그 해 지공거가 되어 백용변(白龍變) 등 인재를 뽑았다.
1178년 판병부사로 지낼 때 어사대의 탄핵이 있었으나, 스스로 병부가 전주(銓注: 인사행정)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중서문하성과 중방의 사례를 들어 반박 탄핵하였다. 중서문하성과 중방도 이에 동조해 도리어 어사대를 탄핵하였다.
정중부(鄭仲夫)가 나이가 많아 물러나자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으나, 왕이 무인 송유인(宋有仁)을 그 위에 앉도록 하였다. 송유인의 사양으로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고, 이듬해 동중서시랑평장사 판리부사(同中書侍郞平章事判吏部事)와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하였다.
1180년 중건한 강안전(康安殿) 문액(門額)을 향복(嚮福)이라 지었는데, 항복과 음이 비슷하다는 무인들의 반발로 영희(永禧)라고 고쳐 올렸다. 하지만 이것도 채택되지 않고 중방의 칭호를 빌린 중희(重禧)로 결정되었다. 이어 문하시랑평장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이득옥(李得玉, 李仁老) 등을 시취하였다.
1181년 총재직(冢宰職)에 있으면서 인사행정을 크게 잘못하였다. 이 때 낭사(郞舍)의 지방관 재직연한에 기준한 인사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으나, 최충렬(崔忠烈)·한문준(韓文俊)의 노력으로 무마되었다.
1183년 70세가 못 되었으나 이광정(李光挺) 등의 압력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겁이 많고 품행에 결점이 있었으며, 권력을 잡았을 때 청탁을 빈번하게 들어주어 인사행정이 바르지 못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