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평장사 민영모(閔令謨)의 현손이다.
11세 때 왕자 시양부(始陽府)의 학우가 되고 19세에 청도감무(淸道監務)를 지내면서 치적이 많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전직되었다.
이때 유천우(兪千遇)가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있으면서 민종유의 인물됨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충렬왕 때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오르고 밀직부사 형조판서(密直副使刑曹判書)에 이르러 물러났다.
다시 기용되어 전법판서(典法判書)·권수판밀직사사(權授判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1309년(충선왕 1) 중대광첨의찬성사판선부사(重大匡僉議贊成事判選部事)로 치사(致仕)하고, 1319년(충숙왕 6) 복흥군(福興君)에 봉하여졌다.
1321년 왕족이 아니면서 군(君)에 봉하여진 사람의 봉작(封爵)을 거둘 때 봉작을 내놓고 다시 찬성사로 치사하였다. 이듬해 간신 권한공(權漢功)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심왕(瀋王)의 추대를 건의하려고 백관의 서명을 강요할 때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기개를 보였다.
또한, 민종유는 천품이 장중하고 풍도가 아름다우며, 함부로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고, 종족 사이에도 돈독하였다. 공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손님의 방문도 사절하여 집안 일을 깨끗이 정리하였고, 말을 좋아하여 항상 당하에 말을 매어놓고 감상하였다.
만년에는 거문고와 퉁소를 즐겨 꽃을 심고 기생들과 즐겼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