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때인 1255년(고종 42)에 음서(蔭敍)로 왕자 시양후(始陽侯) 왕태(王珆)의 부(府)의 학우(學友)가 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청도감무(淸道監務),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도염서승(都染署丞) 등을 거친 후, 무반직으로 바꾸어 흥위위(興威衛) 별장(別將), 좌우위(左右衛) 낭장(郎將), 차흥위위장군(借興威衛將軍) 등을 거쳤다. 1283년(충렬왕 9)에 다시 문반으로 바꾸어 충청도안렴사(忠淸道按廉使), 삼사우윤(三司右尹), 지전리감찰사사(知典理監察司事)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298년(충렬왕 24)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재추(宰樞)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후 전조상서(銓曹尙書),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파직되었다. 1307년(충렬왕 33)에 다시 기용되어 전법판서(典法判書),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고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가, 1309년(충선왕 1)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319년(충숙왕 6)에 복흥군(福興君)으로 책봉되었는데, 1321년(충숙왕 8)에 왕족이 아니면서 군(君)에 봉해진 사람의 봉작(封爵)을 거둠에 따라 봉작을 내놓고 다시 찬성사로 퇴직하였다.
1322년(충숙왕 9)에는 충숙왕(忠肅王)이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귀국하지 않자 권한공(權漢功) 등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심왕(瀋王)의 추대를 건의하려고 백관의 서명을 강요하였다. 이때 민종유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그가 타고난 자질이 장중하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행정 사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함부로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고, 일가친척들에게도 돈독하게 대하였으며 남에게 청탁을 하지 않았다고도 전한다. 말을 좋아하여 항상 마당에 매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았으며, 만년에는 거문고와 퉁소를 즐겨 연주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