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평(南平). 찬성사 문경(文璟)의 아들이다.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때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이 되었으며,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1388년(우왕 14)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 나갔다.
이때 왜구 1,000여 명이 옥주(沃州)·보령(保寧) 등지를 함락,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는 등 계룡산 일대를 노략질하자 왕안덕(王安德)·도흥(都興)·김사혁(金斯革)·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이를 공격하여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대파하였다.
뒤에 우왕이 원중포(元中浦)에 갈 때 한 물가에 이르러, 말을 탄 채 뛰어 건너려는 것을 만류하였다가 비위를 거슬려 삭직되었다.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최영(崔瑩) 등의 노력으로 복직, 다시 문하평리가 되어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翊戴輔祚功臣)의 호를 받고 찬성사에 올랐다.
그뒤 탐학이 심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합포(合浦)·철원 등지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의 즉위초 이림(李琳)의 일파로 탄핵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 1392년 순평군(順平君)에 봉하여졌다. 김제의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