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후기, 문하평리·삼사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고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1383년(우왕 9)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왜구 1,000여 명이 옥주(沃州: 현, 충청북도 옥천군)·보령(保寧) 등지를 함락하고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는 등 계룡산 일대를 노략질하고 있었다. 문달한은 왕안덕(王安德)·도흥(都興)·김사혁(金斯革)·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공격하여 공주(公州) 반룡사(盤龍寺)에서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1384년(우왕 10) 우왕이 원중포(元中浦)에 갈 때 한 물가에 이르러 말을 탄 채 뛰어 건너려는 것을 만류하였다가 왕의 비위를 거슬러 삭직되었다.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최영 등의 노력으로 1388년(우왕 14)에 겨우 복직되어 문하평리가 되었다.
그해 4월에는 우왕이 문달한을 파견하여 요동정벌을 위해 출정한 장수들에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창왕이 즉위해서는 이색(李穡)·이성계(李成桂)·안종원(安宗源) 등과 함께 판상서시사(判尙瑞寺事)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함부로 탐욕을 부린다는 이유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아 철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문달한이 외척인 이림(李琳)의 매부로서 불의를 자행하였다는 이유로 재차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1392년(공양왕 4)에 순평군(順平君)으로 책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 박용운, 『고려사회와 문벌귀족가문』 (경인문화사, 200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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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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