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원택(元澤). 명주(溟州)의 주리(州吏)로 있다가 1090년(선종 7)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교감(校書校勘)·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111년(예종 6)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여 왕의 외할아버지인 이자겸(李資謙)의 반차(班次)를 의논할 때, 어사잡단(御史雜端)으로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정극영(鄭克永)과 더불어 이자겸은 후(后)의 부모이므로 왕이 신하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여 결국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1128년 이부상서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 또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知貢擧) 문공인(文公仁)과 함께 진사 이원철(李元哲) 등 29인에게 선발하였다.
1131년 좌첨사(左詹事)·병부상서·한림학사승지·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를 거쳐 이듬해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를 역임하였다.
1133년 참지정사 판상서공부사 겸 태자소보(參知政事判尙書工部事兼太子少保)·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 1135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守司空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다.
이듬해 태자태보(太子太保), 1137년 수사도 태자태부(守司徒太子太傅),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중외관직(中外官職)을 역임하며 공명정대하게 일처리를 하였으나, 만년에 오랫동안 치사(致仕)하지 않아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시호는 장경(莊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