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포(金浦). 자는 사고(師古). 최유청(崔惟淸)의 매부이며, 한안인(韓安仁)의 외종제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사록(司錄)에 보임되었는데, 정치적 업적이 많아 정항(鄭沆)·한충(韓沖)과 더불어 사록으로는 이정일한(二鄭一韓)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1118년(예종 13) 이지미(李之美)와 함께 송나라에 가서 권적(權適) 등의 제과(制科)와 송제(宋帝) 어필(御筆)의 조서(詔書)를 준 것을 사례하였다. 1119년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가 되고, 1120년에는 청연각(淸讌閣)에서 『예기』월령편을 강의하였다.
1120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예종이 풍악을 좋아한 것을 풍자한 국학생(國學生) 고효충(高孝沖)의 「감이녀(感二女)」라는 시를 왕에게 아뢰었다. 이 무렵 국왕이 조신(朝臣)을 영접하고 방문하는 것에 대해 당나라의 육지(陸贄)가 논한 표(表)를 한 부 쓰고, 자신의 표를 함께 덧붙여 왕에게 올렸다.
1122년 한림학사가 되어 인종이 즉위하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박승중(朴昇中),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김부식(金富軾)과 더불어 『예종실록』 편수관(編修官)이 되었다. 그 해 보문각학사로서 어사잡단(御史雜端) 최유(崔濡)와 더불어 왕의 외조부인 이자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즉 이자겸이 상표(上表)할 때 신(臣)이라 일컫지 않게 하고, 군신의 연회에도 백관과는 다르게 바로 막차(幕次)에 나아가 절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김부식의 반대와 함께 여론이 분분하였다. 한안인이 이자겸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 그 역시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소환되어 1127년(인종 5) 동경유수사가 되고, 이어 판위위시사 한림학사 지제고(判尉衛寺事翰林學士知制誥)에 이르렀다. 문장 능력이 탁월해 1118년 평장사 최홍사(崔弘嗣)를 따라 송나라에 갔을 때 중국인들의 칭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