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상인(商人)이었으나 충숙왕(忠肅王)의 총애로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시종한 공으로 토지와 노비를 받았으며, 총부전서(摠部典書)를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오른 뒤 추성협보공신(推誠寶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원나라에 있을 때 심왕(瀋王)과 당(黨)을 이루어 왕위를 엿보던 무리들을 물리친 공으로 충숙왕이 복위, 환국한 뒤 철권(鐵券)이 내려지고 추성수의좌리공신(推誠守義佐理功臣)의 호가 더해졌으며, 첨의평리진찬성사(僉議評理進贊成事)가 되었다.
그러나 충숙왕은 복위 직후 손기를 충혜왕(忠惠王)의 폐신(嬖臣)으로 오해하여 직첩을 탈취하고 섬으로 귀양보냈다가 곧 소환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5월 왕의 동생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琪: 공민왕)가 원나라에 들어갈 때 전(前) 첨의평리로서 수행하였다. 1351년(충정왕 3) 평해부원군(平海府院君)이 되었다. 이듬해 6월 공민왕(恭愍王)에 의하여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이 되어 전민(田民)을 받았으며, 이 해 8월에 정승(政丞)으로 치사(致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