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문순공(文純公) 원부(元傅)의 증손이며, 찬성사(贊成事) 원충(元忠)의 아들이다.
18세 때에 음보(蔭補)로 호군(護軍)이 되어 집안의 권세를 믿고 방자하게 굴었으며, 밀직부사로 있을 때 충혜왕을 집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1351년(충정왕 3) 만호(萬戶)로 서북면에 파견되었으며, 1354년(공민왕 3) 찬성사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원나라에서는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고려의 장상(將相)급 인물을 지명하여 정예부대를 인솔하여올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40여 인으로 하여금 군사 2,000인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가게 하였다.
그러나 원호는 파견되는 것을 꺼려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가 되고자 하니, 의중을 알아차린 왕은 원호를 성안부원군(成安府院君)으로 일단 봉한 뒤에 유탁·염제신 등과 같이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1356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평소 참소를 잘 하였는데, 공민왕 즉위 초에는 홍언박(洪彦博)의 권력행사를 질투하여 홍언박에게 다른 뜻이 있다고 참소하였으며, 또 1356년 태사도(太司徒) 기철(奇轍), 태감(太監) 권겸(權謙), 그리고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 노책(盧頙) 등에 의한 모반이 적발되었는데도 한가귀(韓可貴)·구영검(具榮儉) 등이 기철 일당을 체포하지 않는다고 참소하였다.
이에 왕은 원래부터 원호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함께 하옥시켜 대질하게 한 뒤 사람을 시켜 옥중에서 쇠뭉치로 타살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