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충렬왕 때 중찬(中贊)을 지낸 원부(元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 원경(元卿)이고, 아버지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원선지(元善之)이다. 찬성사 권렴(權廉)의 딸과 혼인해 원서(元序)와 원상(元庠) 두 아들을 두었다.
1339년(충숙 복위 8) 정월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곧 과거에 급제해 춘추관수찬이 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는 안진(安震)과 이제현(李齊賢)의 천거로 서연(書筵)에 참여했으며, 얼마 뒤에 헌납(獻納)이 되었다.
1348년(충목 4) 8월 찬성사 정천기(鄭天起)가 헌납 곽충수(郭忠秀)와 함께 고신(告身: 직첩)을 받지 않은 채 곧바로 정방(政房)에 들어가 일을 보고 있다며 탄핵했다가 파직당하였다.
1351년(충정 3)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갔으며, 다음 해에 공민왕에게 발탁되어 내서사인 겸 좌부대언(內書舍人兼左副代言)에 올랐다. 이후 왕의 신임을 받아 지주사(知奏事)로 옮기고 전주(銓注)에 참여했는데, 사사로운 정에 흐르지 않고 공정을 기하였다.
1363년(공민 12) 윤3월 홍건적의 난이 평정된 뒤 왕의 파천(播遷)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이 해에 이강(李岡)을 천거해 기무(機務)를 관장하는 직임을 대신하게 한 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오르고 충근찬화공신(忠勤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일찍이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도진무(都鎭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365년 3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나 곧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 6월에 파직되었고, 1366년 6월 신돈이 더욱 권세를 부리자, 이에 근심하고 분해하다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