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정보(正甫)이다. 중찬(中贊)을 지낸 원부(元傅)의 손자이며, 찬성사를 지낸 원관(元瓘)의 아들이다.
8세에 음보(蔭補)로 동북면도감판관이 되었다. 18세에 충선왕의 부름으로 원나라에 있으면서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가 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왕씨(王氏)를 받고 이름을 왕주(王鑄)로 바꾸었다. 벼슬이 우사윤(右司尹)이 되었을 때 왕이 대언(代言)을 맡기자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왕이 노해 사여(賜與)한 성명을 깎고 지철주사(知鐵州事)로 좌천시켰다.
이후 왕이 원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압록강에서 왕을 맞이해 좌천 이전처럼 특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 뒤 대언, 밀직부사 상호군, 밀직사를 역임하고 첨의평리가 되었다.
1321년(충숙 8)부터 5년간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줄곧 왕을 시종하였다. 원나라에 간 충숙왕은 이듬해 심왕(潘王) 왕고(王暠)의 참언으로 영종(英宗)에 의해 힐책당하고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까지 하였다. 심왕은 충숙왕을 퇴위시키고 고려 국왕이 되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1322년에는 권한공(權漢功) 등이 백관을 모아 심왕의 국왕취임을 위해 원나라의 중서성에 글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1324년 영종이 피살되고 진종이 즉위하자 충숙왕은 국왕인을 되돌려받고, 그 이듬해 5월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관직을 잃고 4년 동안 한가로이 지내다가 1330년(충혜 즉위) 4월 찬성사가 되고 판군부 감찰사사(判軍簿監察司事)로 옮겼다. 1334년(충숙 복위 3) 황제의 명을 받아 호부(虎符)를 차고 무덕장군(武德將軍) 겸 제조정동도진무사사(兼 提調征東都鎭撫司事)가 되었다가 1336년(충숙 복위 5) 휘정원차사(徽政院差使)의 명을 받아 귀국하였고,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