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서산(瑞山)이며, 자는 순부(純夫)다. 아버지는 태상경(太常卿) 유성계(柳成桂)이다.
1340년(충혜 복위 1) 과거에 급제해 이듬해 안동사록(安東司錄)이 되었으며, 이어 강릉대군(江陵大君)을 시종해 4년간 원에 있었다. 1334년 충목왕이 즉위한 이후 길창부전첨(吉昌府典籤), 개성참군(開城參軍)을 거쳐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이 되었고, 1347년(충목 3)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이 완성되자 해인사의 사고(史庫)로 옮겼다. 1351년 9월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에 돌아와 11월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연경(燕京)에서 왕을 보좌한 공으로 연저수종(燕邸隨從) 1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어 우대언 ·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다가 1352년(공민 1) 조일신(趙日新)의 무고로 파직되어 덕수 별장에 은거하고 있었다. 조일신이 죽은 뒤 다시 기용되어 1354년 2월 우대언(右代言)이 되어 이듬해 정월 국자시를 주관하였으며, 이후 판전교(判典校) · 판도판서(版圖判書) ·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56년 7월에는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가 되었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임명되었다. 1359년 6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있을 때 기철(奇轍) 일당을 잡아죽이는 데(1356년) 세운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으며, 8월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올랐다.
1361년 11월 겨울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에게 남행하도록 권하였다. 이어 한림학사승지 동수국사(翰林學士承旨同修國史)를 역임했으나, 안우(安祐) 등의 위협으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나갔다. 1362년 10월에는 지도첨의(知都僉議)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시중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1363년 윤3월 홍건적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의 호를 받았고,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졌다. 또한 같은 해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변란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워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가 되어 1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에 올랐다.
1365년 8월 유숙의 충직을 두려워하던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시골에 돌아가 있다가 1368년(공민 17) 9월 신돈에 의해 홍주(洪州)로 장류(杖流)되었다가, 12월 영광에서 신돈이 보낸 자에게 교살당하였으며, 1372년(공민 21) 정월 덕풍군(德豊郡) 가야동(加也洞)에 장사지냈다. 1376년(우왕 2) 11월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