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부원군(府院君) 홍규(洪奎)이다.
남양(南陽) 홍씨(洪氏) 가문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홍규가 당시의 집정인 임유무(林惟茂)를 목 베고 국정을 왕에 되돌리면서부터 이다. 이를 통해 정치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종형(從兄)인 홍자번(洪子藩)이 충렬왕(忠烈王)대에 수상을 역임하면서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그 명망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망가로서의 위치로 인하여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홍규는 장녀가 원나라의 공녀(貢女)로 선발되자 딸의 머리를 깎아 이를 막고자 하였다. 이로 인하여 충렬왕비(忠烈王妃)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해도(海島)로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적몰되었으며, 부녀 모두가 혹형(酷刑)을 받았다. 장녀는 몽고장수 아홀대(阿忽台)에게 강제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은 지 2년 뒤에 셋째 딸이 세자(충선왕)비로 되고 또 20년 뒤에는 다섯째 딸이 충숙왕비(忠肅王妃)가 되어 자매가 나란히 고려왕실의 후비(后妃)가 되었다. 남양 홍씨 가문의 위광과 자매의 뛰어난 자질이 이러한 연속 혼인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혼인 직후 원나라에 들어가 재원활동(在元活動)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함께 생활을 한 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이들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