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동국대학교 경내이다. 이에 관한 기록이 이안눌의 후손인 이석(李氵+奭) 의 『동강유고(桐江遺稿)』에 실려 있는 「동원기(東園記)」에 있다.
이에 의하면 이 곳에서 당시의 대표적인 시인들과 시를 짓고 풍악을 즐기면서 놀던 다락을 ‘시루(詩樓)’라 하였고, 그 단을 ‘시단’이라 불렀다 한다.
그리고 동원 마루터기 바위에다 시단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현손인 이주진(李周鎭)이 영조 초에 ‘東岳先生詩壇(동악선생시단)’이라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원은 원래 이안눌의 진외가인 능성구씨(綾城具氏)의 터전이었다가 이안눌의 증조부인 행(荇) 때부터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소유가 되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 기록되어 있듯이, 서울을 내려다보는 신선의 고장으로 낙선방(樂善坊)청학동(靑鶴洞)이라 불렸다.
거기에 드나들며 시를 통하여 우정을 교환한 문사로는 이안눌과 함께 정철(鄭澈)의 제자였던 권필(權韠)을 비롯하여 평생의 맞수였던 이호민(李好閔)과 홍서봉(洪瑞鳳), 그리고 이정구(李廷龜) 등이 있었다.
이 동악선생시단의 바위는 1984년 동국대학교에서 고시학관을 지을 때 그대로 떠다가 ‘시루’의 자리인 학생회관 옆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심한 풍화로 쪼개져버려 그 조각을 모아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동악시단은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당대의 문인층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韓國詩史)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