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의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에, 한림학사승지, 좌군수, 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유(子由)
시호
문의(文懿)
이칭
김부철(金富轍)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079년(문종 33)
사망 연도
1136년(인종 14)
본관
경주(慶州)
주요 관직
한림학사승지|지추밀원사|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판상서예부 수국사 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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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전기에, 한림학사승지, 좌군수, 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부철(金富轍). 자는 자유(子由). 아버지는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김근(金覲)이며, 김부식(金富軾)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097년(숙종 2) 문과에 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111년(예종 6)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추밀원부사 김연(金緣)을 따라 송나라에 가서 문명을 떨치고 귀국하여 감찰어사가 되었다.

1117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형제국이 되기를 청하자, 금나라를 회유하기 위해 화의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재상들의 제지로 왕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첨사부사직(僉事府司直)이 되어 문학으로서 우대를 받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어사중승(御史中丞)에 발탁되었다.

1124년(인종 2) 사은부사로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과 이부·호부·예부의 3부상서(三部尙書)를 거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역임하였다. 인종이 변방문제를 묻자, 경성(京城)과 여러 주진(州鎭)의 성을 더 높이고 못을 깊이 파며 무기를 비축하도록 하고, 사자를 보내어 상벌로써 주리(州吏)를 감독해야 한다고 하였다.

1134년 묘청(妙淸)이 서경천도와 신궁건립을 주장하자 형 김부식과 함께 극력 반대하였고, 이듬해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기전략책인 평서십책(平西十策)을 올리고, 좌군수(左軍帥)에 이어 지추밀원사가 되어 출정하였다.

상훈과 추모

그 전략으로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인종으로부터 금대(金帶)를 받았다.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판상서예부 수국사 주국(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修國史柱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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