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흥덕(興德). 객성(客省)을 지낸 장유(張儒)의 아들이다.
1011년(현종 2) 거란이 침략하여 태묘(太廟: 종묘)와 궁궐을 불태우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河拱辰)이 붙잡혔다는 풍문을 듣고 모두 달아났으나, 채충순(蔡忠順)·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 등과 더불어 호종한 공으로 중추사(中樞使)를 거친 뒤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었다.
1014년 일직(日直) 황보 유의(皇甫兪義)와 더불어 거란침입 이후 군액(軍額)의 증가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해지므로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상장군 최질(崔質)과 김훈(金訓) 등이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 그를 유배시켰다. 1015년에 호부상서로 임명되었고, 그 해에 죽었다. 별세한 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