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후기, 전교령·판전교시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成均館) 생원의 숫자를 100인으로 늘리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다. 당시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전과 문장 작성에 대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는데, 이때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복을 입으려 하였으나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이 부모상에 100일만 복을 입으므로 관직에 취임하였고, 그 대신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1375년(우왕 1) 김의(金義)가 명(明)나라 사신을 죽인 후 북원(北元)으로 갔고, 이인임(李仁任) 등은 그를 수행하였던 사람들이 귀환하자 잘 대우하였다. 박상충은 이를 탄핵하였으며, 이후 이인임 등이 북원과 국교를 맺으려 하자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외교(親明外交)를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親明策)을 쓸 것과 북원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上書)하였다.
그 해 간관(諫官)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親元派)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誅殺)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親明派)인 전녹생(田祿生)·정몽주·김구용·이숭인·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 가던 도중 별세하였다.
박상충은 성품이 말이 적고 강개(慷慨)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경전과 역사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성명학(星命學)에도 통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고 항상 삼갔으며 불의로 부귀한 것을 보면 멸시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세종실록(世宗實錄)』
단행본
-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 (일지사, 1990)
- 박찬수, 『평도공 박은 연구』 (경인문화사, 2019)
주석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