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巨濟) 반씨(潘氏)의 시조. 자(字)는 군수(君秀)이고, 호는 해려재(海旅齋)이다.
1267년(원종 8)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이장용(李藏用)이 고려에 왔던 몽골의 사신 흑적(黑的)에게 글을 보내 일본과 국교를 맺지 말 것을 청한 것이 문제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장용이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원종(元宗)은 반역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장용을 영흥도(靈興島: 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유배 보냈다. 또한 반부는 접반기거사인(接伴起居舍人)으로 이를 고발하지 않은 죄로 채운도(彩雲島)로 유배 당할 뻔하였는데 흑적의 만류로 무사하였다. 뒤이어 이정(李挺)과 함께 일본과의 국교(國交) 맺기를 요구하는 몽골과 고려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몽골의 국서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1년 가까이 억류되었다가 답서(答書)를 받지 못하고 이듬해 돌아왔다.
이에 몽골은 일본이 국교 맺기를 거절한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다시 추진을 고려에 촉구하였다. 그 결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佺), 시랑(侍郞) 진자후(陳子厚) 등과 함께 몽골 사신 흑적·은홍(殷弘) 등을 인도해 일본에 갔으나, 쓰시마섬[對馬島]에 이르러 입국하지 못하고 왜인(倭人) 2명을 사로잡아 이듬해 돌아와서 몽골에 보냈다.
1270년(원종 11) 비서승(祕書丞)이 된 그는 강화창(江華倉)을 풀어 관료와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1274년(원종 15)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서해도(西海道)에 가서 전함을 만들 공장(工匠)과 역도(役徒)를 징집하였는데, 마침 원나라(몽골)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함 300척을 만들 것을 매우 독촉하던 중이었다.
그해 지병마사(知兵馬事) 나유(羅裕)와 박보(朴保)의 부사(副使)가 되어 제1차 일본원정(日本遠征)에 참전해 이키섬[壹岐島]을 함락하고 북구주(北九州)를 치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많이 부서져 되돌아왔다.
1280년(충렬왕 6) 좌사간(左司諫)으로 과거 전시(殿試) 급제자들과 함께 국왕이 지은 시(詩)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 같은 해 장경도량(藏經道場)을 열었을 때 백문절(白文節) 등과 함께 두견화에 대한 국왕의 시에 화답시를 지었다.
1281년(충렬왕 7) 좌사의(左司議)로 왕명을 받아 제2차 일본 원정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원나라의 원수(元帥) 흔도(忻都)와 홍다구(洪茶丘)·범문호(范文虎) 등을 위로하였다. 1282년(충렬왕 8)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원(試員)이 되어 시부(詩賦)로 38인, 십운시(十韻詩)로 51인, 명경(明經) 2인을 뽑았다.
그리고 1284년(충렬왕 10)에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승보시(升補試)의 시원이 되어 시부와 경의(經義)로 33인을 뽑았다.
경상남도 거제의 문절사(文節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