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각도의 주진(州鎭)에 두었던 군대 중 하나인 초군에 속한 관청의 종을 의미하는 초군노(抄軍奴)인 박녹대(朴祿大)이며, 충선왕비(忠宣王妃)인 조비(趙妃) 자매의 남편이다.
1298년(충렬왕 24) 세자인 충선왕(忠宣王)이 귀국하여 국왕이 되었는데, 부인 한국공주(韓國公主: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가 조비를 질투, 원(元)나라에 모함하였다. 당시 박경량(朴景亮)은 한국공주와 조비 사이에서 중재하려다가 얻어맞았으며, 이후 원이 조비를 징계할 때 함께 원나라에 잡혀가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충선왕은 다시 국왕이 되자 앞서 1303년(충렬왕 29) 자신이 모함을 받았을 때 이를 저지한 공으로 특별히 박경량을 등용하였다. 당시 일가친척까지 모두 양민(良民)이 되는 특혜를 베풀었다. 또한 권한공(權漢功)· 김지겸(金之兼) 등과 함께 국왕에게 가죽띠인 정대(鞓帶)를 받았다.
1310년(충선왕 2)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이때 충선왕은 원나라에 있으면서 전지(傳旨)로 정치를 하였다. 당시 연경(燕京)에 있던 김심(金深)·이사온(李思溫) 등은 왕이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박경량· 최성지(崔誠之)·권한공 등의 심복 때문이라고 휘정원(徽政院)에 무고하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312년(충선왕 4) 원나라가 충선왕에게 귀국을 명령하였다. 충선왕이 가지 않으려고 박경량에게 핑계를 대도록 하자, 농번기라서 추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원에게 보고하여 귀국을 미루었다.
충선왕 때 부춘군(富春君)에 봉하여졌고, 충숙왕(忠肅王) 때 다시 흥례군(興禮君)에 봉하여졌다.
1320년(충숙왕 7) 상왕(上王: 충선왕)이 강남(江南)에 귀양가게 되자 수안군(遂安君) 이연송(李連松) 등과 함께 시종하였다. 일행이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을 때 항상 충선왕을 모함하던 바얀투구스[伯顔禿古思]의 간계로 뒤쫓아 온 원나라 황제의 사자에 의하여 왕이 다시 소환되었다. 이 때에 충선왕이 무사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시종하던 대부분의 신하들이 도망쳐 버리자 박경량은 이연송과 함께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