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 할아버지는 박지빈(朴之彬)이며, 아버지는 군부총랑(軍薄摠郎)을 지낸 박장(朴莊)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련(朴連)이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막다가 그의 참소로 무고를 당하여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제수되어 경상도 염세(鹽稅)를 감독하게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내서사인(內書舍人) · 밀직제학(密直提學) · 개성부윤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피봉되었다. 1344년(충혜왕 복위 5)에는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이천(李蒨)과 함께 진사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았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시강하여 상을 받았다.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할 때 찬성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일생 동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예안의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