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1344년(충혜왕 복위 5) 지공거(知貢擧) 박충좌(朴忠佐)가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전공정랑(典工正郎)으로 앞서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73년 강화만호가 되었을 때 왜구가 양천(陽川)을 노략질하고, 한양부(漢陽府)에 이르러 가옥을 불태웠는데도 방비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으로 장형(杖刑)에 처해졌다. 1376년(우왕 2)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으나, 재주도 없고 행실도 바르지 못한데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주어 원수직을 얻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또, 이 때 군적(軍籍)을 편성하면서 연호군(煙戶軍)과 별군(別軍)을 정원 외로 편성한 죄로 파직되었는데, 후임 원수인 유영(柳濚)이 부임하기도 전에 전사(田舍)로 돌아갔다. 이 틈을 이용하여 왜구 20여 척이 나주에 들어와 병선과 병영 및 민호를 태우고 노략질을 하였으나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 죄로 순위부(巡衛府)에 체포되어 장형 100에 처해지고 하동현에 유배되었다. 곧 석방되어 계림원수(鷄林元帥)로 기용되었는데, 일본해도포착관(日本海道捕捉官) 박거사(朴居士)가 계림에 침입한 왜구에게 고전하는 것을 방관하여 대패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