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처음 이름은 박재중(朴在中)이다. 호는 국간(菊澗)이며, 아버지는 박수길(朴秀吉)이다.
1353년(공민왕 2)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과 동지공거(同知貢擧) 홍언박(洪彦博)이 주관한 과거 시험에서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권덕생(權德生)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이후 공민왕(恭愍王) 대 헌납(獻納), 우왕(禑王) 대에는 대언(代言)의 관직에 있었다. 공민왕 대 신돈(辛旽)이 집권하고 있었을 당시 팔관회(八關會)가 열렸다. 이때 신돈의 측근인 홍영통(洪永通)이 별군(別軍)을 관장하고 있었다. 팔관회가 열리고 도성(都省)의 정단제(庭壇祭)에서 별군이 차려 놓은 음식을 도둑질하므로 도성의 하급관리인 성리(省吏)가 꾸짖고 금지시켰다. 홍영통은 별군을 시켜 도성의 관료인 헌납 박진록(朴晉錄) 등을 마구 때리게 하여 부상을 당하였으며, 당시 피가 흘러 병풍과 요를 더럽힐 정도였다.
1366년(공민왕 15)에는 반신돈 계열인 정공권(鄭公權: 정추(鄭樞))이 신돈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자 우헌납(右獻納, 정6품) 박진록이 감옥에서 정공권을 만난 이후 동료들에게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간관(諫官)으로서의 부끄러움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다음해 신돈은 신덕린(申德隣)·이준(李竴)· 정리(鄭釐)·안면(安勉)과 함께 파면시켰다.
우왕 대 왕의 명령으로 천도(遷都)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박진록은 홍중선(洪仲宣)· 권중화(權仲和)·이색 등과 더불어 서운관(書雲觀)과 회의하여 북소(北蘇) 기달산(箕達山: 현, 황해도 신계군 소재)으로 천도에 관계하였다. 이때의 천도는 북소조성도감(北蘇造成都監)까지 설치하여 진행되는 듯 했지만 끝내 성사되지 못하고 중지되었다.
또한 우왕대에 조준(趙浚)이 재앙을 피하는 기도문인 기양소(祈禳疏)를 지었는데 거기에 “정직하고 충실한 사람을 멀리하고 아첨하고 간사한 자들을 가까이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 대해 지신사(知申事) 김도(金濤), 대언 박진록· 김주(金湊)가 말하기를 “만약 왕이 정직하고 충실하나 멀리하는 자는 누구이며, 아첨하고 간사하나 가까이하는 자는 누군인가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라고 하여 조준에게 글을 고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임금의 명령이나 국가의 문서를 맡아 보던 기관인 고원(誥院)에서 작성하는 글은 먼저 제목을 지정해 주고 재상(宰相)들이 심사한 다음에 확정하도록 하자는 건의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또한 우왕 대 밀직제학(密直提學)의 관직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