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첨의중찬(僉議中贊) 홍자번(洪子藩)의 증손으로,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홍경(洪敬)의 손자이며, 선공부령(繕工副令) 증문하시중 홍승연(洪承演)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음보(蔭補)로 관계에 나와 여러 벼슬을 지내고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안동부사를 거쳐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되었으나 김경유(金景儒)의 말을 빼앗은 것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뒤에 신돈(辛旽)에 의하여 감찰대부(監察大夫)와 밀직부사를 지냈으나,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주살되자 같은 당으로 몰려 파직, 유배되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로 기용되어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이어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에 순성경절협찬공신(純誠勁節悏贊功臣)이 되었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82년(우왕 8)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년 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고, 1388년에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에 이르렀는데, 홍영통의 행적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된 뒤 1392년 왕조가 바뀌자 일단 파직되었으나, 곧 노인직(老人職)으로 판문하부사에 복직되고 남양백(南陽伯)에 봉해졌다. 1395년 조선 태조의 생일잔치에 참석하고 돌아오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호는 안민(安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