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지리도참사상(地理圖讖思想)에 근거하여 나라의 기초〔國基〕를 연장하기 위해 3소(三蘇)에 궁궐을 조성하려는 계획은 명종 때부터 일어났다. 1174년(명종 4)에 왕명으로 좌소(左蘇)는 백악산(白岳山), 우소(右蘇)는 백마산(白馬山), 북소(北蘇)는 기달산(箕達山)이라 하고, 이곳에 나라의 기초를 연장하기 위한 궁궐을 짓기 위해 연기궁궐조성관(延基宮闕造成官)을 두게 하였다.
이후 1378년(우왕 4) 11월에 우왕이 좌사(左使) 홍중선(洪仲宣),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 등에게 장차 수도를 옮기려고 하니 도선(道詵)의 글을 상고해서 보고하라고 하였다. 우왕이 천도계획을 세운 것은 개경이 바다를 끼고 있어 왜구로부터 환난을 당할까 우려되고, 지기(地氣)에는 성쇠가 있으며, 도읍을 정한지도 오래되어 마땅한 곳을 택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왕명을 받은 홍중선·권중화 및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 우대언(右代言)박진록(朴晉祿)이 서운관(書雲觀)과 더불어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 결과를 전 총랑(摠郞) 민중리(閔中理)가 상소하여 보고하였는데, 도선의 밀기(密記)에 기록되어 있는 북소 기달(箕達)은 곧 협계(峽溪)인데 도읍을 옮길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우왕은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권중화와 판서운관(判書雲觀) 장보지(張補之), 중랑장(中郎將)김우(金祐) 등을 협계에 보내어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권중화가 돌아와서, 북소 궁궐 옛터에 무릇 1백 80칸을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북소조성도감(北蘇造成都監)을 설치하였다. 당시 조정의 의논은 협계는 산골에 치우쳐 있어 조운(漕運)과 선박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여 마침내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