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추(內宰樞)의 설치 목적과 시기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전하는 바가 없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진수(李進修)가 1371년(공민왕 20)에 내재추를 폐지할 것을 왕에게 상소한 것으로 보면 그 이전부터 내재추 제도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78년(충렬왕 4)에 왕의 측근 인물로 구성된 필도적(必闍赤, 비칙치 · 비체치)이 금중(禁中)의 별청(別廳)에서 사무를 처리한 한 바 있다. 이를 별청재추(別廳宰樞)라 하여 내재추제의 시원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내재추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신돈(辛旽)이 집권하기 2년 전인 1363년(공민왕 12)부터이다. 그 당시에 내재추 오인택(吳仁澤)과 김달상(金達祥)을 내상(內相)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신돈이 몰락한 후 1371년에 나주목사 이진수는 내재추를 혁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상소를 올린 목적은 신돈의 추종세력인 내재추를 몰아내는데 있었겠지만, 그의 주장대로 내재추가 완전히 혁파된 것은 아니었다.
우왕이 내재추를 뽑아 왕명의 출납(出納)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 임견미(林堅味), 홍영통(洪永通), 조민수(曹敏修)가 선임되어 항상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먼저 여기를 통과한 후에야 시행되었다. 임견미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승진하여 도길부(都吉敷), 우현보(禹賢寶), 이존성(李存性)과 더불어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는 권한을 독차지하고 마음대로 처결하였다. 이 때문에 홍영통과 조민수는 시중(侍中)으로 있으면서도 관리선발에 참여할 수 없었다.
1397년(우왕 5) 9월에 정당문학(政堂文學) 허완(許完)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방안(尹邦晏)이 유모 장씨(張氏)와 결탁해서 내재추 임견미 등을 없애려고 음모하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보면 내재추로 선임된 인물은 금중(禁中)에서 인사를 비롯하여 국정의 대소를 처리함에 있어 시중보다 더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였고, 그 폐단은 다른 재상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재추의 폐단은 조선 초기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1400년(정종 2) 8월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내재추를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그 요지는 국가의 모든 일이 내재추 5∼6인의 손아귀에 달렸고, 도당(都堂) 대신은 국사에 참여하지 못하므로 고려의 폐법(弊法)을 거울삼아 태조의 법을 준수하여 내재추를 혁파함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내재추는 고려 후기 충렬왕 때 별청재추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내재상(內宰相) 또는 내상이라고도 하였다. 내재추는 국왕이 소수의 측근세력을 선발하여 궐내에 두어 정사를 처리하게 한 제도로서 폐단이 많아 조선 태조 때 이를 폐지하였다가 그 후 일시 부활하여 정종 때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