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년(공민왕 11) 안우(安遇) 등을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고, 이듬해 개경을 수복하였다. 뒤이어 대장군(大將軍)으로서 간신(奸臣) 김용(金鏞)의 모함을 받은 이방실(李芳實) 등을 주살하였다.
1363년 김용의 일당이 공민왕(恭愍王)을 시해하고자 흥왕사(興王寺)의 행궁(行宮)으로 쳐들어 왔을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최영(崔瑩) 등과 함께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흥왕토적일등공신(興王討賊一等功臣)되었고 다시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수복경성일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단성양절공신(端誠亮節功臣)의 호를 받았다.
1364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어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아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뇌물을 좋아하여 청탁이 크게 성하게 되었고 자연 나라의 기강도 문란해졌기 때문에 청풍군(淸風郡: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으로 유배되었다.
신돈(辛旽)의 집권 뒤 풀려나와 지도첨의(知都僉議)가 되었으나 전시중(前侍中) 경천흥(慶千興), 전평리(前評理) 목인길(睦仁吉) 등과 신돈의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1367년 상주(尙州)로 장(杖)을 맞고 유배되었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다. 뒤에 신돈이 오인택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탈출하여 숨었으나 다시 잡혀 사리성(思利城)의 봉졸(烽卒: 봉화의 일을 맡은 군사)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