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선주(지금의 경북 구미시 선산읍). 조부는 한림학사 김신함(金愼緘)이고, 아버지는 우사의대부 김우류(金右鏐)이며, 아내는 오선(吳僐)의 딸이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경성(京城)이 점령되고 왕이 남천할 때, 좌대언(左代言)으로서 왕 및 태후·공주를 모시고 임진강을 건너 남행하여 수종한 공으로 1363년 신축호종일등공신(辛丑扈從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이 일어났을 때 왕을 모시고 피난한 공으로 부시피난일등공신(扶侍避難一等功臣)에 책봉되었다.
1364년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오인택(吳仁澤)과 함께 왕의 총애를 믿고 전주(銓注)를 맡아 현량을 밀치고 가까운 친척들을 추천하여 관작을 범람시켜 오인택은 청풍(淸風, 지금의 청북 제천군 청풍면), 김달상은 옥주(沃州, 지금의 군산시 옥구))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사면되어 한양윤(漢陽尹)에 제수되었으며, 1365년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1366년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공권(鄭公權)이 신돈(辛旽)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극언, 이들을 순군에 하옥시켜 찬성사(贊成事) 이춘부(李春富), 밀직부사 김란(金蘭), 첨서밀직(簽書密直) 이색(李穡),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달상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다.
그 뒤 금위제조관(禁衛提調官)으로 승진하였으나, 1368년 둘째아들인 김문현(金文鉉)이 형의 애첩을 강간한 사건으로 김달상으로부터 질책을 받자, 신돈에게 김달상과 형 김군정(金君鼎)을 참소하여 신돈에 의하여 살육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