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아버지는 적성군(赤城君) 우길생(禹吉生)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곧이어 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오래 역임하면서 정사를 주관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의 명령에 따라 좌시중에 임명되어 방어하려 하였으나, 실패해 파직되었다. 그 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인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나 이초(彛初: 尹彛와 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외방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철원으로 유배되고,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1392년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렀다. 이로 인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해 다시 탄핵을 받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광주(光州)에 다시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었다.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 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되었고, 1399년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손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로, 왕의 재위시에는 탄핵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