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판문하부사, 우의정, 영의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의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 ·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삼사좌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 문하찬성사 ·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은사로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돌아왔다.
1393년(태조 2)에 삼사좌복야로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임하면서, 새 도읍지의 종묘 · 사직 · 궁전 · 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렸다.
그 뒤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396년에는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8년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한편, 의약에 정통해 조선 초에 고려 말경에 전해온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이 너무 간요하다 하여 서찬(徐贊) 등과 함께 다시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을 편집하였다.
그리고 1399년(정종 1)에 조준(趙浚) · 김사형(金士衡)의 명령에 따라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사(故事)를 비롯해 의약 · 지리 · 복서(卜筮)에 통달하고 전서(篆書)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와 개성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의 전액(篆額)의 글씨를 남겼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
- 『한국의학사』(김두종, 탐구당, 1979)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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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사은사로 명나라행 : 『태조실록』 1권, 1392년(태조 1) 8월 26일. "사은사가 돌아와 명의 황태자가 죽고 그 아들 윤문으로 황태손을 삼았음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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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향약간이방 편집 : 『세종실록』 60권, 1433년(세종 15) 6월 11일. "《향약집성방》이 완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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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시호 문절 추증 : 『태종실록』 16권, 1408년(태종 8) 11월 23일. "영의정부사로 치사한 권중화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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