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아버지는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권한공(權漢功)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우 · 좌부대언(右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담당하였다. 1377년(우왕 3)에는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으며, 문하에서 이름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뒤 삼사좌사(三司左使) · 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 ·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삼사좌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 문하찬성사 ·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은사로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주1
1393년(태조 2)에 삼사좌복야로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임하면서, 새 도읍지의 종묘 · 사직 · 궁전 · 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렸다.
그 뒤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396년에는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8년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한편, 의약에 정통해 조선 초에 고려 말경에 전해온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이 너무 간요하다 하여 서찬(徐贊) 등과 함께 다시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을 주2
그리고 1399년(정종 1)에 조준(趙浚) · 김사형(金士衡)의 명령에 따라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사(故事)를 비롯해 의약 · 지리 · 복서(卜筮)에 통달하고 전서(篆書)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와 개성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의 전액(篆額)의 글씨를 남겼다. 시호는 주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