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공직(公直), 호는 중화재(中和齋).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강의(姜毅)이다.
은진에 살면서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1470년(성종 1) 효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김용석(金用石) · 신종호(申從濩) · 박연(朴演) · 손효조(孫孝祖) · 정경조(鄭敬祖) · 권주(權柱) 등과 함께 주자의 고사에 따라 향약을 만들고, 『소학』을 강론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소학계(小學契) 또는 효자계(孝子契)라 하였다. 부모의 병간호가 지극하였고, 죽은 뒤에는 여묘(廬墓)의 예를 다함으로써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은진갈산사(葛山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