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池奫)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어머니는 무녀(巫女)이다.
지윤은 군졸에서 시작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워 공민왕 대에는 판숭경(判崇敬) 부사(府事)에 임명되었다가, 1372년(공민왕 21) 서북면(西北面) 원수(元帥)에 임명되었다. 1374년(공민왕 23)에는 경상도(慶尙道) 상원수(上元帥)로 양광 · 전라 · 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로 임명된 최영(崔瑩)과 함께 제주(濟州) 목호(牧胡) 토벌에 참가하였다.
지윤은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辛旽)이 처형되자 신돈의 옷가지와 패물을 편취하였다. 강을성(姜乙成)이 판도사(版圖司)에 금을 납품하였다가 값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죄를 짓고 처형되자 그의 아내를 첩으로 삼았으며, 강을성이 미처 받지 못한 금값인 포 1,500필도 받아내었다. 그의 아들 지익겸(池益謙) 역시 재상으로 처형당한 신순(辛順)의 딸과 혼인하여 신순의 집과 재산을 모두 차지하였다.
지윤은 우왕(禑王) 대에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등과 함께 정권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의 전횡은 우왕의 유모 장씨(張氏)와의 관계, 그리고 김승득(金承得) · 김윤승(金允升) · 화지원(華之元) · 이열(李悅) 등을 중심으로 하는 당여(黨與)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우왕 즉위 초에 유모 장씨와 간통하였으며, 이인임과 협력하여 김속명(金續命)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해 나갔다.
지윤은 1375년(우왕 1) 북원(北元)이 외교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자, 그들을 맞아들이자는 입장이었다. 북원 사신을 맞아들일 것을 논의하자, 정몽주(鄭夢周) ·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한 유신(儒臣) 수십 명이 이에 반대하는 상서(上書)를 올렸다. 또한 간관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이 이인임과 지윤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들을 비롯하여 북원과의 외교관계 재개에 반대하는 유신들 거의 모두가 유배형에 처해졌다. 또한, 이 사건으로 길안(吉安)에 유배된 임박(林樸) 역시 쇠사슬에 묶여 전법사(典法司)로 송치되었는데, 다른 유배지로 이동하는 도중에 죽였다.
지윤은 전주(銓注), 즉 관리 임용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는 우왕 대에 이인임(李仁任), 최영(崔瑩), 경복흥(慶復興) 등과 함께 전주를 하면서 군공(軍功)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복흥은 도목(都目), 즉 정기 인사이기 때문에 군공을 먼저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지윤이 이러한 경복흥의 주장을 물리쳐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관철하였다.
왜구가 전주(全州)를 침략하였을 때 출전할 원수(元帥)를 구하지 못하자 지윤의 아들 지익겸이 물망에 올랐다. 지윤은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최영과 이인임이 반대하였다. 지윤과 이인임 사이에 틈이 벌어진 직접적 원인은 이 일 때문이었으나, 이인임과 상의하지 않고 임박을 죽이는 등 지윤은 당여에 의지하여 점차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다.
결국, 1377년(우왕 3) 지윤은 김윤승 등 그의 당여를 동원하여 이인임과 최영을 제거하기 위한 모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의는 이인임 · 경복흥 · 최영에게 발각되었으며, 오히려 역공을 당하여 그와 당여 20여 명과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