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수(印公秀)의 본관은 교동(喬桐)이다. 아버지는 중랑장, 병마절제사, 병부상서를 지낸 인대신이다.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주로 중국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며 사신으로 활동하였다. 고려와 원 사이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한편, 원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무리한 요구를 완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269년(원종 10) 세자 왕심(王諶)이 몽골에 입조하게 되자, 채정(蔡楨) · 임유간(林惟幹) 등과 함께 세자를 수행하였다. 1271년(원종 12)에는 몽골 원수 아해(阿海)가 진도에서 삼별초와 전투를 벌일 때 여몽연합군을 적극적으로 구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몽골에 보고하였다.
이어 같은 해 2월과 8월에 두 차례 원에 다녀오면서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한 둔전 혁파, 원에 끌려간 포로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1275년(충렬왕 1) 정월에는 일본원정군에게 군량을 공급하기 어렵다는 표문을 원 세조에게 전달하였다.
인공수는 원종,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등과 매우 가까운 사이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인공수는 평소에 원종에게 호복과 변발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원종은 듣지 않았다. 그렇지만, 1275년 9월에 충선왕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제국대장공주와 경화궁주(敬和宮主) 사이에서 위상 문제로 다툼이 벌어진 것을 식독아(式篤兒)가 원나라에 보고하려고 하자 저지하였다.
1279년(충렬왕 5)에는 충렬왕과 충선왕, 공주가 입조하였다가 귀국하는 길에 공주가 견룡군에게 금으로 만든 꽃을 꽂고 문무백관은 예복을 입고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곧바로 개입하여 시복(時服)을 입는 것으로 조정하였다. 이 밖에도 1276년(충렬왕 2) 대장군으로 왕명을 받아 다루가치와 함께 홍주에서 금을 채굴하였다.
인공수는 몽골인 겁령구(怯怜口) 인후(印侯)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1277년(충렬왕 3) 순안공(順安公) 왕종(王琮)과 그 어머니 경창궁주(慶昌宮主)가 맹인 승려 종동(終同)을 불러 초제를 열었는데, 내수(內竪) 양선대(梁善大) 등이 임금을 저주하고 공주와 종동을 혼인시키려는 것이었다고 무고하였다.
이때 충렬왕은 인공수와 이습(李槢), 이지저(李之氐), 인후(印侯) 등과 함께 국문하게 하였다. 국문에 함께 참여한 인후의 본명은 홀라타이〔忽刺歹〕였으나, 인공수와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그의 성씨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