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필은 공민왕~우왕 대 초기에 활동한 무신이다. 그는 공민왕 대에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 등과 함께 신돈(辛旽) 제거 모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판서(判書) 신귀(辛貴)의 고변(告變)으로 모의가 탄로 나서, 다른 이들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다가 신돈이 제거되자 함께 모의에 참여한 경복흥(慶復興) · 윤승순(尹承順) 등과 함께 정계에 복귀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7월에 명(明)에 제주(濟州)의 말 2,000여필을 진상하기 위해 목호(牧胡)들을 정벌하였는데, 이때 이희필은 양광도상원수(楊廣道上元帥)가 되어 최영과 함께 참여하였다. 공민왕이 피살당하고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서북면상원수(西北面上元帥)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9월에는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임명되었다.
1377년(우왕 3) 3월에는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대립하자 경복흥(慶復興), 최영 등과 함께 지윤의 당여(黨與)를 제거하였다. 이때 지윤(池奫)이 “이희필은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의 장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희필의 정치적 약점은 그가 이인임의 정적을 제거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달에 왜구가 착량(窄梁)을 노략질하고 강화(江華)에서도 노략질하였는데, 이때 이희필은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에 임명되어 개경을 방어하였다. 9월에는 왜구가 영광(靈光) · 장사(長沙) · 모평(牟平) · 함풍(咸豊) · 해주(海州) · 평주(平州) 등지를 노략질하였는데, 이때에는 원수(元帥)가 되어 최영 등과 함께 출정하였다.
1377년(우왕 3) 12월에 사망하자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