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367년(공민왕 16) 상호군으로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 전시중(前侍中) 경복흥(慶復興)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살해하려고 모의하다가 누설되어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된 뒤에 풀려나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이 되었다. 1375년(우왕 1) 경상도부원수로서 왜적을 물리쳤으며, 1377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있을 때 왜구를 무찔러 이 지역이 평온하였다 한다.
1379년 양백연(楊伯淵)을 주살할 때 지문하사(知門下事)로 이에 연루되어 수졸(戍卒)이 되었다. 1389년(창왕 1)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첨서밀직사사(詹書密直司事) 권근(權近)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왕씨(王氏)로 공민왕의 후사를 정하라는 명나라 황제의 지시를 전함으로써 창왕이 폐위되고 정창군 왕요(定昌君 王瑤: 나중에 恭讓王)가 즉위하였다. 뒤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이르렀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