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상장군과 추밀원부사를 역임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74년(원종 15)
주요 관직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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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신은 고려 후기 상장군과 추밀원부사를 역임한 무신이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원에 파견되었으며, 여몽연합군의 일원으로 김방경과 함께 일본원정에 참전하였다가 폭풍우에 익사하였다. 김신의 죽음은 고려와 원 사이에 외교적 현안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 상장군과 추밀원부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및 인적 사항

김신의 가계와 출생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고려사(高麗史)』에는 그의 장인을 낭장(郎將) 왕연(王涓)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왕연은 왕실의 먼 친척이라고 하였다.

주요 활동

김신은 1273년(원종 14) 7월에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생일을 축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9월에는 이분희(李汾禧)와 함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으로 일본원정에 참여하였다. 이때 고려군은 중군과 좌우군으로 이루어진 삼익군(三翼軍)으로 편성되었으며, 김신은 그중에서 좌군사를 맡았다. 이키섬〔壹岐島〕에 도착한 여몽연합군은 항복을 청하였다가 다시 싸우는 등 기만전술로 맞서는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좌부원수(左副元首) 유복형(劉復亨)이 유시(流矢)에 맞아 큰 부상을 입자 여몽연합군은 돌연 싸움을 멈추었는데, 그날 밤에 불어온 폭풍우로 인하여 전함들이 크게 파손되었다. 그 사이에 김신은 익사하였다.

김신의 사망 이후에 김방경은 익사할 위기에 처한 주장(主將)을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좌군 지병마사(知兵馬事) 위득유(韋得儒)를 파직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위득유와 노진의(盧進義)가 모반 혐의로 김방경을 무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충렬왕유경(柳璥)이 원 조정에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등 이 사건은 고려와 원 사이의 외교적 현안으로 떠올랐다.

광평공(廣平公) 왕혜(王譓)가 김신의 장인 왕연의 노비들을 빼앗았는데, 김신이 소송을 통해 되찾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김신이 일본원정에서 죽자 노비들은 다시 왕혜의 소유가 되었고, 왕혜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에게 그 노비들을 바쳤다. 그러자 제국대장공주는 노비의 일가친척을 모두 불러모아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논문

이재범,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일본정벌에 관한 재인식」(『사림』 48, 2014)
이정신, 「원간섭기 원종·충렬왕의 정치적 행적」(『한국인물사연 』 10, 2008)
김위현, 「여·원 일본정벌군의 출정과 여·원관계」(『국사관논총』 9,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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