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대장군으로 지병마사(知兵馬事)가 되어 부사 손세정(孫世貞)과 함께 도원수 김방경(金方慶)의 휘하에서 제1차 일본정벌에 참전하여 이키섬[壹岐島]을 거쳐 북구주(北九州)를 쳤으나 태풍을 만나 돌아왔다.
이 때 주장인 좌군사(左軍使) 김신(金侁)이 태풍으로 물에 빠져죽었는데, 그를 구하지 못한 책임으로 김방경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7년에 김방경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중랑장 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 등과 모의하여 김방경이 왕과 공주 및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제거하고 강화에 들어가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원나라의 장수 흔도(忻都)와 홍다구(洪茶丘)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게 하여 마침내 대청도로 귀양가게 하였다.
1278년에 상장군이 되었는데 “나라에서 담선법회(談禪法會)를 베푸는 것은 원나라를 저주하려는 것이다.”라고 홍다구에게 무고하여 왕으로 하여금 변명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게 하였다.
이 때 원나라에서 대청도에 귀양간 김방경과 함께 들어오게 하자 사태가 위태롭게 되니 공모자 노진의가 “내가 이에 이른 것은 위득유 때문이다.”하고 죽으므로, 이를 듣고 자지도 먹지도 못하다가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