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李仁)은 원종(元宗) 대부터 충렬왕(忠烈王) 대에 활동한 무신이다. 『 고려사(高麗史)』와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하는 그와 관련한 기록은 수차례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활동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기록상 이인은 1274년(원종 15) 2월에 처음으로 원에 파견되었다. 이때 이인은 중서성(中書省)에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가 부담해야 할 300여 척의 함선과 군량 등을 경감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국왕이 원에 입조할 때 거주할 행궁(行宮)에 드는 비용을 청구하였으며, 원에 체류할 비용에 보태기 위해 함께 가지고 간 은을 교초(交鈔)로 바꾸어 왔다. 1278년(충렬왕 4) 정월에는 원에서 역서(曆書)를 반포한다는 내용의 조서를 받아 왔으며, 충렬왕은 도성 밖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특히, 1278년 3월에는 위득유(韋得儒)와 노진의(盧進義)가 홍차구(洪茶丘)에게 고려의 담선법회(談禪法會)가 상국(上國)을 저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무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고려와 원이 강화(講和)를 체결하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충렬왕과 혼인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미 원에 사신으로 여러 번 파견된 경험이 있었던 이인을 보내어 해명하려고 하였다. 그 사이에 이 일은 홍차구가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보고하였으며, 다시 중서성에 최종 보고되었다. 이때 원의 평장(平章) 합백(哈伯)은 충렬왕이 직접 아뢰어야 하는 일이라 하여 이인 등 고려 사신 일행을 돌려보냈다.
1280년(충렬왕 6) 정월에는 친종장군(親從將軍) 박연(朴延)과 함께 동녕부(東寧府)에 파견되어 고려 출신 공장(工匠)을 추쇄(推刷)하였다. 이후 1281년(충렬왕 7) 2월에는 군마(軍馬)에 소요되는 사료 비축량을 감축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그해 8월에 한 차례 더 원에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