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자티무르〔金完子帖木兒〕는 중국 원나라에서 활동한 환관이다. 1328년(충숙왕 15) 원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그 이듬해 9월에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충숙왕(忠肅王)이 병으로 황제의 조서를 직접 받을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이를 힐책하고는 홀치〔忽赤〕 민자명(閔子明)을 보내 직접 조서를 받을 수 있도록 충숙왕을 타일렀다.
그는 순제 때 원의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되었다. 그가 환국하자 대소 신료들이 다투어 잔치를 열고자 하였다. 이때 재상 채하중(蔡河中)이 충혜왕(忠惠王)이 원에 압송된 이유를 묻자, 그는 충혜왕이 오로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만을 등용하여 어진 인재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1335년(충숙왕 복위 4) 엘 테무르〔燕鐵木兒〕의 아들 텡기스〔唐其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얀〔伯顔〕 및 고르기스 등과 함께 반란군에 붙잡혔다. 이는 그가 원 순제와 매우 가까운 환관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김완자티무르와 그의 집안은 고려에서 상당한 위세를 떨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 김석견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조적(曹頔)의 난 때 직접 왕을 시종하여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으며, 이후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에 올랐다. 충혜왕이 원에 바칠 여종을 구하고자 관원을 보내 김석견의 노비를 탈취하려고 하였는데, 그는 아들 김완자티무르의 위세를 이용하여 오히려 왕에게 직접 노비를 바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충혜왕은 김석견을 좋은 말로 타일렀다.
또한 1329년(충숙왕 16) 고려에 사행하였을 때 김완자티무르는 자신의 족당(族黨)에게 관직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는 등 인사문제에도 개입하였다. 이로 인해 관직을 얻지 못한 신시용(申時用)과 신정(申丁)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였으며, 이인길(李仁吉) 등이 비목을 마음대로 고쳐 흑책정사(黑冊政事)라는 이름을 얻었다.